*요14;26 [위로하고 가르치는 성령님]
2026년 3월 13일조회 2
*요14;26 [위로하고 가르치는 성령님]
“보혜사 성령, 곧 아버지께서 내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육체적으로는 곧 떠나가시지만, 하나님께서 아버지 이름으로 보내실 “보혜사(성령님)가 그 자리를 대신해 모든 것을 가르침을 상기시키고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의 직접적인 동행이 끝난 후에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말씀과 진리가 계속 그들 안에 살아 움직일 것을 보장하는 약속이며, 초대 교회 신앙의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따라서 14:26절은 예수님이 떠나가신 후에도 제자들과 신자들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삶 속에서 실천하며, 진리 안에서 성장하게 될 것을 의미하는 중요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대표하시지만, 인간의 형체에 갇혀계시지 않으므로 제한이 없습니다.
인성에 구애받는 그리스도는 어디든지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분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이땅에 자기 후계자로 성령을 보내시는 게 제자들에게도 유익했습니다. 그렇게되면 지리적 위치나 유리한 접근성에 따라 그리스도에게 남다른 혜택을 받는 사람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성령을 통해 구주께서 누구에게나 다가가실 수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성령님은 위로자
앞이 캄캄하고 미래가 암담하고 의지할 데 하나 없이 외로울 때, 어떤순간, 어떤장소, 어떤슬픔, 어떤고통에 처하든지 믿음으로 기도하면 위로자이신 성령께서 그 응답으로 우리에게 파견됩니다. 세상 친구들과 완전히 연이 끊기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도 어떤아득함도 우리를 하늘 보혜사에게서 끊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디로 가든지 그분은 늘 오른편에서 우리를 붙들고 지지하고 떠받치고 격려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과 우리 모두가 겪는 외로움과 두려움, 고난 가운데 성령님은 우리에게 친히 다가와 위로해주십니다.
고후1:3~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이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라” 하나님은 우리를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위로를 통해 우리도 또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도구가 되야겠습니다. 우리가 겪는 아픔과 슬픔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시며, 그러한 경험이 우리를 더욱 연약한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자로 세우시는 은혜를 생각나게 합니다.
요16:13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너희를 인도하시리니...” 성령님은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이끌어 주시고, 혼란과 오류 가운데서 진리의 말씀을 발견하시고, 믿음으로 성장하게 인도하신다는 분이심은 믿으시기 바랍니다. 삶의 갈림길과 어려움속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진리 안에서 담대하고 바른 길을 걷도록 힘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40:1절 “너희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라”
그들이 고난이 끝나고 그들의 죄악이 사함을 받았음을 알려주어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고난과 죄악으로부터 자유를 주시고, 새로운 희망과 평안의 시기를 예고하시며 위로하시는 말씀하지만, 고난 후에 반드시 회복과 평안을 주신다는 희망과 위로를 느끼실 수 있길 바랍니다. 고난중에 있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과 격려를 반영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자로서 주변의 아픈 마음들을 위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위로는 마음의 평안과 깊은 안식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힘들고 지칠 때 일으켜 세우시는 위로자, 우리 안에 임하는 평화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마음을 어루만지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두 번째, 성령님은 가르치는 선생님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불립니다. 진리를 밝히고 보존한 것이 그분의 일입니다. 무엇보다 그분은 진리의 성령으로 마음 가운데 거하셔서 위로자가 되십니다. 진리 안에 위로와 평화가 있습니다. 거짓 속에는 참다운 평화나 위로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해 마음에 말씀하시고 진리를 새기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받은 사람은 광신적이지 않습니다. 침착하고 확고부동하며 생각과 말과 행동이 터무니없지도 않습니다. 기만적인 교리의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은 진리의 증거를 거절하지 않는 이들에게 인도자와 방패가 되십니다.
성령에 지배받지 않는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든 사탄의 마술에 영향받습니다.
그들은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진리에 길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시119편 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둡고 불확실한 인생길을 밝히는 등불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밝혀 주는 빛이며, 안전한 걸음을 걷게하는 안내자입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삶 속에서 적용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심을 확신하며 나아갑시다.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갈등과 혼란 중에 바른 길을 알려주시며,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필요한 지혜와 통찰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의 가르침은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 살아 움직이는 진리입니다.
세 번째,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성령님의 위로와 가르침을 매일 경험하는 삶은 신앙의 힘과 깊이를 더합니다.
*예화: “어둠 속의 등불과 위로자”
어느 날 밤,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두운 산길을 한 사람이 걷고 있었습니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하고, 발걸음마다 미끄러지기 쉬운 험한 길이었죠. 그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한치앞도 보이지 않아 계속 위험을 느꼈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등불 하나가 보였습니다. 그 등불은 그저 작은 촛불이었지만, 어둠 속에서 확실한 길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다가가 보니, 그 등불을 든 자는 이 길을 잘 아는 친구였습니다. 친구는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길을 안내했습니다. 그 사람은 친구의 작은 등불 덕에 두려움을 이기고 안전하게 산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은 우리 인생의 어두운 길을 밝히시는 보혜사의 역할을 하십니다. 우리가 혼란스럽고 두려울 때, 성령님의 위로와 가르침의 빛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시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를 기억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평화를 주시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게 합니다.
우리도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증인이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1
첫 번째, 성령님은 위로자
두 번째, 성령님은 가르치는 선생님
세 번째,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결론: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주님의 약속하신 성령님의 위로와 가르침을 구하고 의지하는 삶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어려움 속에서 힘들 때, 성령님께 맡기고 위로받으십시오.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고 순종하도록 성령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동행하여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기독교 기본교리 창조(1)
유신론적 진화론
유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께서 진화의 과정을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개념이다.
과학적 논리와 성경을 모두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 이론에 빠져 듣기 쉽다. 하지만 유신론적 진화론에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전 과정에 친밀하고 적극적을 개입 하셨다고 묘사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9: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33:6, 9)
“유신론적 진화론의 문제는 ... 창조가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그것은 네모난 원과 같이 모순이다. 그런 것은 없다. 진화와 창조를 섞는 것은 사각 못을 원형 구멍에 넣는 것과 마찬가지다. 들어 맞지 않는다.”
2. 창세기 1~11장을 역사적으로 보지 않고 문학적으로 본다.
“성경은 창세기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창세기라는 말은 ‘시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창세기는 우주, 태양계, 지구, 생명, 사랑, 죄, 이스라엘, 민족들, 구원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창세기를 이해해야만 나머지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11장의 내용은 신약에서만 100회 이상 인용되거나 언급된다. 이 부분은 역사적인 사실이 맞는지에 대해 논란이 되는 부분인데, 1~11장의 모든 부분이 신약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다. 신약 성경의 모든 저자들이 창1~11장을 언급했다.
어떻게 이 열한 장의 내용이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들과 분리될 수 있을까?
아브라함이 살았던 연대는 고고학으로 입증되었으며,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관련하여 언급된 장소들, 관습들, 종교들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2장에서 시작된다. 만일 창세기 1장은 신화고 12장부터 역사라면, 이 열한 장 중 어디까지 허구이고 어디까지 진실일 것일까? 창세기 전체는 동일한 역사적 서술체로 씌어있다.”
3. 하나님의 창조물과 하나님의 말씀에 동일한 지위를 부여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긴 하지만, 성경처럼 충실하고 분명하게 계시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마름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40:8)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